배움/책

003 최은영, 쇼코의 미소

Mar liso 2022. 3. 28. 23:05

 

 

 

 

p. 115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p.164 한지와 영주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p.203 먼 곳에서 온 노래

나는 내 병을 지독한 구취로 기억한다. 아무리 이를 닦고 샤워해도 그 몸의 냄새가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고,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근면했던 삶의 태도도 그 병 앞에서는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옷 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체력과 정신력이 소진되었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병원 복도 창 밖으로는 길 건너 마로니에 공원이 보였다. 마로니에 공원 담벼락 위에 앉아 여한 없이 노래를 부르던 스물, 스물하나의 나와, 약물 부작용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 스물 넷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기억, 그 노랫소리, 웃음을 나는 잃었다. 실수로 꼬리 칸을 자르고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처럼, 예전에 내가 나라고 알던 사람을 나는 잃어버렸다. 스물의 나는 스물넷의 나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두운 레일 위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선배도 러시아에서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였지만 나에게 선배의 어려움은 말 그대로 남의 일일 뿐이었다. 세상 제일 아프고 괴로운 건 나였으니까, 내 눈에는 내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기심에는 선배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도 없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런 나를 그치지 않고 사랑해준 선배에게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해야 마땅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p.248 비밀

영숙이 다섯 살에 영숙 아빠가 저세상으로 갔다. 말자는 엄마, 엄마 부르는 예쁜 것을 동서 집에 맡기고 식당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 작은 것이 일찍 철이 나서 어른 노릇을 해내던 모습이 말자는 두고두고 아팠다. 그런 이유로 말자는 지민을 철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제 손으로는 손톱 하나 제대로 깎지 못하고 어리광부리는 철딱서니 없는 애로 키우고 싶었다.

 

p.254 비밀

"뭐 먹을래? 암꺼나 말해봐. 할미가 다 사줄게. 봉봉 먹을까 쌕쌕 먹을까?"

말자는 지민의 손을 잡고 병원 바깥으로 걸어갔다. 지민이 울 때면 말자는 그애와 같이 산보를 했다. 바깥공기도 쐬고, 변하는 풍경도 보고 하면 서러운 마음이 잦아든다는 것을 말자는 알았다.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랬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랬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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